2002년 5월18일, 토요일, 델리, 맑음

129.1 동물원 같지 않은 동물원을 감.
오늘 하루 시간도 남고 해서 그 전에 가지 못했던 동물원에 갔다.
역시 토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외국인은 나 혼자였고 대부분 인도인들이었는데, 주로 가족단위로 온 사람들이었다.
이곳도 외국인과 인도인과의 입장료를 다르게 책정하고 있어, 외국인은 150루피, 인도인은 10루피의 입장료를 받고 있다.
동물원에 들어가는데 어떤 인도인이 무척이나 친한 척을 하면서 자기가 가이드를 해주겠다고 하길래 정말 집요하게 하도 달라붙어서 결국 50루피를 주기로 하고 가이드를 쓰기로 했다. 사실 동물원 가면서 가이드를 써 보기는 난생 처음이고 들어보지도 못한 것을 해보게 됐다.
그런데, 밑에 내용이 나오지만 동물원구경보다 가이드 안내가 너무 웃겨서 재미있었다.
사실 동물원 안에는 별로 볼 것 없다.
우리나라 서울대공원 동물원보다도 못한 느낌이다. 있는 동물이라고는 사슴, 호랑이, 사자, 코끼리, 코뿔소, 또 이상한 새들 몇 마리, 그게 전부다.
진짜 볼 것 없는 동물원이다.
그런데, 정말 웃긴 것은 가이드가 정말 웃긴다.
생긴 것도 웃기게 생긴 놈이었는데,(마치 신밧드의 모험, 만화에 나오는 웃긴 아저씨 얼굴임) 진짜 웃겼다.
사슴을 가리키며 하는 말
“저것 좀 봐라. 저거!! 저거 본 적 있냐? 한국에 저런 거 없지? 저게 사슴이다!!”
나는 혹시 사슴 뒤에 뭐가 있나 해서 한참을 봤는데, 사슴밖에 없었다.
나는 진짜 황당해서 “사슴은 나도 수없이 봤다. 다른 거 보러 가자”
그랬더니, 당연한 듯이 고개를 끄떡이며, “진짜 놀라운 것을 보여 주겠다.” 하는데, 결국 데려간 곳이 호랑이 있는 곳이었다.
“저게 바로 인도의 자랑 `뱅골 호랑이`이다. 진짜 멋있지 않냐? 난 호랑이를 중학교때 여기 와서 첨 봤다. 너 진짜 호랑이 본거 처음이지?”
진짜 황당한 가이드에 나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호랑이는 한국에도 있다. 너 못 들어 봤냐? 한국호랑이, 백두산호랑이!”
그런데, 그놈이 내 말을 듣더니, 적잖이 실망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다음 블록으로 가더니, 사자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장난을 쳤다.
“야~ 저게 뭐냐?” 이 말에 그놈이 아주 신이 났다.
“이~야, 너 저거 못 봤구나. 저거 `사자`라는 거다. 저거는 아프리카랑 인도밖에 없는 동물이야. 저거 진짜 무섭다. 호랑이보다 더 사납다. 지금은 자는데, 일어나면 진짜 사나운 동물이다.”
하여간에 기를 쓰고 한참을 설명을 하길레, 나는 고개를 한참 끄떡였다.
진짜 웃겼다.
끝나고 가이드 비를 50루피 줬다. 더 달란다. 10루피 더 줬다.
동물원보다 가이드가 재미있었던 동물원 구경이었다.
전날 비행기를 놓치고 할 일이 없어진 저는 델리 국립 동물원(National Zoological Park)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황당하고 웃긴 '동물원 가이드 투어'를 경험했습니다.
<2002년 5월 18일의 일기>
어떤 인도인이 자기가 가이드를 해주겠다고 하도 달라붙어서 50루피를 주기로 했다. 가이드(신밧드 닮은 아저씨): "저것 좀 봐라! 한국엔 저런 거 없지? 저게 '사슴'이다!!" 나: "......" 가이드: "저건 인도의 자랑 '뱅골 호랑이'다! 너 호랑이 처음 보지?" 나: "한국에도 호랑이 있어. 백두산 호랑이..." 가이드: (시무룩)
동물보다 가이드 아저씨의 리액션이 훨씬 재미있었던 그날, 저는 사자를 보고 "우와, 저게 뭐냐!"라고 모르는 척 연기해 주며 가이드의 기를 살려주는 것으로 관람을 마쳤습니다.
1. 2002년 vs 2015년: 동물원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시간이 흘러 2015년, 저는 주재원이 되어 가족들과 다시 한번 그 동물원을 찾았습니다. 13년이 지났지만 변한 건 없더군요. 동물들은 더위에 지쳐 그늘에 숨어 잠만 자고 있었고, 휑한 우리만 구경하다 왔습니다.
그런데 딱 하나, **'관람의 주체'**가 바뀌었습니다. 2002년엔 제가 사슴을 구경했지만, 2015년엔 인도인들이 저와 제 가족을 구경하더군요.
- "Hello, Photo please!"
- "One selfie!"
시골에서 올라온 순박한 인도 가족들에게 하얀 피부의 외국인은 호랑이보다 더 신기한 존재였나 봅니다. 결국 우리는 동물 구경은 뒷전이고, 수많은 인도 사람들과 악수하고 사진 찍어주느라 '인간 판다'가 되어야 했습니다.
2. 외국인이 인도 동물원에 가면 안 되는 이유
17년 인도 생활의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인도 여행 중이라면, 동물원은 일정에서 과감히 빼세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동물원 밖이 훨씬 더 재밌는 '리얼 사파리'이기 때문입니다. 입장료 150루피(외국인 요금, 지금은 500루피 이상)를 내고 들어가서 자고 있는 사자를 보느니, 그냥 델리 시내를 걷는 게 낫습니다.
[인도 길거리 무료 사파리 라인업]
- 소 (Holy Cow): 도로 한복판을 점거하고 교통을 통제하는 위엄.
- 원숭이: 옥상을 뛰어다니며 빨래를 훔쳐 가는 날렵함.
- 돼지: 진흙탕을 뒹구는 청소부.
- 낙타: 짐수레를 끄는 사막의 배.
- 코끼리: (요즘은 드물지만) 결혼식이나 축제 때 등장하는 거대한 포스.
- 공작새: 공원이나 관공서 근처에서 우아하게 날아다님.
길거리에 나가면 이 모든 동물이 살아서 움직이고,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진짜 인도의 매력입니다.
3. 그래도 동물원에 가야 한다면?
만약 "나는 꼭 동물을 봐야겠다" 혹은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하시는 분들은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 동물을 보러 가는 게 아닙니다. 인도 사람들의 **'가족 나들이 문화'**를 보러 가는 것입니다. 돗자리 펴고 도시락 먹고, 아이들과 뛰어노는 그들의 일상을 관찰하는 인류학적 탐방이라고 생각하면 만족도가 높습니다.
- 연예인 체험 가능: 쏟아지는 사진 요청을 즐기세요. 1일 한류 스타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4. 맺음말
23년 전, 사슴을 가리키며 "한국엔 이런 거 없지?"라고 했던 그 순진했던 가이드 아저씨는 잘 계실까요? 어쩌면 그 아저씨에게 동물원은, 갇혀 있는 동물을 보는 곳이 아니라 **'신기한 외국인에게 말을 걸어볼 수 있는 곳'**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도에서의 진짜 야생을 느끼고 싶다면, 동물원이 아니라 시장통으로 나가십시오. 그곳에 진짜 생존 본능이 꿈틀대는 삶의 현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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