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25일, 월요일, 델리, 맑음

75.1 색깔 물풍선을 맞다.- 우이씨
오늘 우리 동네 길거리 버스정거장 안쪽에서 빨강 물풍선을 맞았다.
내 반바지 뒤 엉덩이부분에 맞았는데, 바지가 다 빨갛게 물들었다. 동네 꼬마들이 던진 것에 맞은 것이다. 지난주부터 우리 학교에 물풍선 맞은 학생을 보긴 봤지만, 결국 나도 오늘 맞은 것이다.
이번 주말이 홀리축제인데, 홀리에는 사람 얼굴 안 가리고, 길가는 사람, 벽에 오줌누는 사람, 남녀 노소 구분하지 않고 마구마구 색깔가루 혹은 색깔섞은 물풍선을 던지고 논다. 이 색깔은 어떤건 잘 지워지고, 향기도 허벌향이나는 좋은 것도 있지만 어떤 악의가 있는 사람들은 페인트를 넣고 던지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 길거리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분명히 싸구려색소를 쓰기 때문에 피부에 좋지도 않고 잘 지워지지도 않는다. 때로는 그런 문제 때문에 사람들끼리 끼리끼리 모여서 자기네들이 쓸 색소를 따로 사서 함께 즐기기도 한다.
이번 주말이 축제인데, 지난주부터 날씨가 더워지자, 벌써 축제분위기가 일고 있다. 특히 골목길 다닐 때는 외국인은 더욱더 조심해야 한다. 그들에게 외국인은 주요 타겟인듯 하다. 특히 아이들이 몰려있는 곳은 일찌감치 분위기 파악해서 도망가야 한다.
오늘 집에 와서 그거 지우는데 무려 1시간 걸렸으나 완벽히 지우는데는 실패했다. 내일까지는 지워지겠지 뭐.
2002년 3월 25일, 홀리 축제를 일주일 앞둔 어느 날, 제 낡은 일기장에는 짜증 섞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 우리 동네 길거리 버스정거장 안쪽에서 빨강 물풍선을 맞았다. 내 반바지 뒤 엉덩이부분에 맞았는데, 바지가 다 빨갛게 물들었다... 집에 와서 그거 지우는데 무려 1시간 걸렸으나 완벽히 지우는데는 실패했다."
인도에 온 지 고작 두 달 반, 가방 하나 들고 온 게 전부라 옷도 몇 벌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귀한 반바지에 붉은 물이 들어 속상했던 20여 년 전의 저는, 그저 "외국인은 주요 타겟"이라며 투덜대고 있었죠. 그때만 해도 홀리는 축제 당일은 물론, 일주일 전부터 동네 꼬마들의 물풍선과 색깔 가루 공격이 시작되는, 그야말로 길고도 격렬한 '전쟁' 같은 축제였습니다.

그런데 17년이 지난 2025년, 저는 매년 홀리를 겪으며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해가 갈수록 홀리가 예전만 못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 일주일 전부터 시작되던 축제 분위기는, 이제 당일이나 기껏해야 전날쯤에나 시작됩니다.
- 길 가던 강아지까지 색깔 범벅이 되고, 온 동네가 페인트칠을 한 듯했던 그 격렬함이 사라졌습니다.
- 집집마다 현관 앞에 그리던 화려한 '랑골리(Rangoli, 색 가루 그림)' 장식도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집집마다 현관앞에 하는 색장식들입니다. 랑골리 라고 합니다. - 이제는 길거리에서 색을 무작위로 던지거나 아무 외국인이 타겟팅 되는 일이 자주 없습니다.
혹시 저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요? 혹은 전통이 없어지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10월 말의 '디왈리(Diwali)' 축제는 해가 갈수록 더 화려해지고, 더 시끄럽고, 더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 현상은 전통이 약해졌다기보다는, 인도의 사회 변화 속에서 두 축제의 '유행'이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1. '홀리'가 약해지는 이유: 도시화와 사회적 인식의 변화
홀리는 본질적으로 '거리의 축제'이자 '일탈의 축제'입니다. 하지만 현대 인도의 도시화는 이 두 가지 핵심 요소를 억제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 안전과 사생활 문제: 2002년의 제가 물풍선을 맞고 기분 나빠했듯이, 홀리는 종종 '축제'라는 이름으로 낯선 이에게 원치 않는 신체 접촉이나 공격(물풍선, 페인트)을 가하는 것을 정당화했습니다. 특히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성추행 문제("Bura na mano, Holi hai" - "기분 나빠 마, 홀리잖아")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면서, 많은 중산층 가정들이 '거리의 위험한 홀리' 대신 **'아파트 단지 내의 안전한 홀리'**나 **'친구들끼리의 프라이빗 파티'**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 환경 문제 (물과 화학 색소): 수자원 부족이 심각한 인도에서 물을 낭비하는 '물풍선' 놀이는 점점 더 비판받고 있습니다. 또한, 피부에 유해한 화학 색소나 지워지지 않는 페인트 대신, 비싸지만 안전한 '유기농 색소(Organic Gulal)'를 사용하자는 캠페인이 확산되면서, 예전처럼 과격하게 색을 뒤집어씌우는 문화가 약해졌습니다.
- '통제'되는 축제: 2002년의 동네 골목길은 무법천지였지만, 지금의 구르가온 고급 아파트 단지들은 정해진 구역(Lawn)에서, 정해진 시간에만 홀리 파티를 허용합니다. 자연히 그 격렬함과 지속 기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2. '디왈리'가 강해지는 이유: 경제 성장과 과시의 문화
반면, 디왈리는 현대 인도의 '경제 성장'과 '소셜 미디어'라는 두 개의 날개를 달고 더욱 화려하게 비상하고 있습니다.
- 최고의 소비 시즌: 디왈리는 인도 최대의 '쇼핑 시즌'입니다. 경제가 성장하고 중산층의 가처분 소득이 늘어나면서, 디왈리 보너스로 새 차를 사고, 금을 선물하고, 집을 꾸미고, 비싼 선물을 주고받는 문화가 더욱 강해졌습니다.
- '보여주기' 좋은 축제: 홀리가 '더러워지는' 축제라면, 디왈리는 '화려해지는' 축제입니다. 집집마다 밝히는 수천 개의 등불과 조명, 새로 산 전통 의상, 화려한 저녁 파티는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과시하기에 완벽한 소재입니다. 남들보다 더 화려하게 축하하려는 경쟁 심리가 디왈리를 더욱 성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 소음과 빛의 과시: 비록 최근 몇 년간 대도시에서 공기 오염 문제로 폭죽을 금지하고 있지만, 그 욕구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디왈리 밤에 터지는 폭죽의 규모와 소음은 그 집안의 '부'와 '성공'을 상징하는 과시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결국 2002년의 그 격렬했던 홀리는, 더 안전하고, 더 깨끗하고, 더 '통제된' 도시 문화 속으로 흡수되며 조금씩 온순해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디왈리는 경제 성장과 과시 문화에 힘입어 더욱 화려하고 거대해지고 있죠.
17년 전, 제 바지에 묻었던 그 붉은 물감 자국은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인도의 그 거칠고 순수했던 축제의 마지막 흔적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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