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22일, 금요일, 델리, 맑음, 35도

72.1 영국문화원 2번째 수업
오늘 영국문화원 2번째 수업이었다. 수업은 그냥 수업인데, 뭘 쓰려고 이러나 하겠지만, 오늘 좀 뭐라 말하기가 그런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화요일까지 학생수가 전부 6명이었는데, 오늘 새로 1명이 들어왔다. 여기까지는 아무일 없는건데,
문제는 오늘 온 그 학생도 한국인이다. 그것도 전번에 한번 만났던, 오~ 마이 갓.
학생이 전부 7명인데, 그 중에 한국인 3명이다. 이거 놀랄만한 일 아닌가?
나만 놀란게 아니라, 선생도 웃었고, 인도인들도 웃었다. 인도에서 영어수업시간에 인도인이랑 한국인이랑 반씩 있으니, 좀 그렇다고 밖에 할말이 없다.
이것을 가지고 평가하기에,
역시 우리나라 국력이 많이 세졌군. 이라 평가하기도 그렇고
할일 없는 한국인 많군. 이라 평가하기도 그렇고,
한국인의 교육열은 역시 높다. 라고 평가하기도 그렇다.
솔직히 조금 쪽 팔리기도 하다.
지난번 비즈니스 수업 때는 16명중에 외국인이 나랑 프랑스아줌마 단2명이었는데, 그 때랑 비교하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거 같다.
한명은 인도에서 그냥 여행 겸, 영어 공부하러 온 학생이고, 또 한명은 인도에서 소프트웨어 공부하면서 영어 공부하는 학생이다. 나만 직장 다니는 사람인데, 하긴, 나도 실제로는 학생이지.
학생이 말이 좋아 학생이지, 사실 어떻게 보면 할일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니깐 그게 문제다.
좌우지간, 수업은 무난히 잘 끝났다.
여기서 영어 실력 뽀록 나면, 한국인들 사이에서 소문 다 날까 봐 겁난다. 그렇게 안될려면,
숙제도 열심히 하고, 열라리 예습해서 쪽팔리지 않게 해야 겠다.
2002년 3월 22일, 제 낡은 일기장에는 영국문화원 새 영어 수업 첫날의 당혹감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첫 수업을 했는데, 사람이 일단 적어서 좋았다. 단지, 6명... 그런데, 문제는 오늘 온 그 학생도 한국인이다. 그것도 전번에 한번 만났던, 오~ 마이 갓... 학생이 전부 7명인데, 그 중에 한국인 3명이다. 이거 놀랄만한 일 아닌가? 나만 놀란게 아니라, 선생도 웃었고, 인도인들도 웃었다... 솔직히 조금 쪽 팔리기도 하다."
20여 년 전 델리의 한 영어 교실에서, 7명의 학생 중 절반 가까이가 한국인이었던 이 기묘한 풍경.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음이 나는 에피소드지만, 당시의 저는 꽤나 당황스럽고 심지어 '쪽팔리기'까지 했습니다. "여기서 영어 실력 뽀록나면 한국인들 사이에 소문 다 날까 봐 겁난다"며 엉뚱한 걱정까지 했으니까요.
1. 2002년, 통계가 증명하는 '희귀했던 한국인'
왜 그렇게까지 놀라고 어색해했을까요?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델리에서 한국인은 통계적으로도 '희귀한' 존재였습니다.
- 극소수의 교민: 2003년 외교부 공식 재외동포현황 통계에서 인도는 유의미한 집계 순위에조차 들지 못했습니다. 당시 델리 지역의 유학생이 약 백여명, 그리고 LG, 삼성, 현대 등 90년대 말에 갓 진출한 소수 대기업의 주재원과 그 가족, 몇몇 자영업자를 모두 합쳐도 델리 NCR 지역의 한인 수는 많아야 1천~1.5천 명 내외로 추정됩니다.
- 손에 꼽던 기업: 인도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라고 해봐야 제가 일기장에 적었던 LG전자(1997년), 삼성전자(1995년), 현대자동차(1996년) 등 대기업 1세대들이 전부였습니다.
- "North or South?": 당시만 해도 인도에서 "한국에서 왔다(I'm from Korea)"고 하면, 열에 아홉은 "North or South?"(북한? 남한?)라는 질문이 되돌아왔습니다. 인도는 비동맹 중립 노선을 견지하며 북한과도 오랜 수교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으니까요.
이런 시절이었으니, 델리 인구 수천만 명 중 고작 천여명에 불과했던 한국인이, 영국문화원의 한 영어 교실 7명 중 3명이나 모였다는 것은 그야말로 통계적으로 믿기 힘든, 놀라운 사건이었던 셈입니다.
2. 2025년, 'K-웨이브'와 'K-Company'의 나라로
그리고 20여 년이 지난 2025년. 지금의 인도는 어떻습니까? 'North or South?'를 묻던 그 나라는, 이제 'K-Culture'의 본산지로 너무나도 유명해졌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감상이 아닌 숫자로 증명됩니다.
- 폭발적인 인구 증가: 2002년 델리에 1천여명 수준이던 한인 수는, 2023년 외교부 공식 통계에 따르면 인도 전역에 총 11,360명으로 증가했습니다. 특히 델리 수도권(NCR)에만 4,400명 이상이 거주하며 거대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공식자료는 아니지만, 2025년 인도 한인회의 정보에 따르면 인도전역에 약 2만명, 델리 NCR에는 6천이 살고 있다고도 합니다) - 기업 진출의 격세지감: 2002년 손에 꼽던 대기업 몇 개가 전부였다면, 2024-2025년 현재 인도에서 활동하는 한국 기업의 수는 500~600개를 훌쩍 넘어섭니다.
- 델리 NCR이 '한인타운'?: 이처럼 교민과 기업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제 델리 NCR은 거대한 한인 생활권이 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국 식당만 해도 델리에 3곳, 구르가온에 7~8곳, 노이다에 5곳이 넘습니다. 라면, 고추장, 된장을 파는 한국 슈퍼도 곳곳에 생겨, 이제는 한국 음식이 그립다는 말이 무색해졌습니다.
- 'K-Culture'의 상륙: 물론 동남아나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그 속도가 조금 느렸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넷플릭스를 통해 '사랑의 불시착', '오징어 게임' 같은 K-드라마가 인도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K-Culture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 K-Food와 K-Pop: 이제 K-Pop에 맞춰 춤을 추는 인도 청소년들을 볼 수 있고, 델리나 구르가온의 쇼핑몰에서는 'K-Food' 페스티벌이 종종 열립니다. 한국 라면과 김밥을 파는 현지 식당도 늘어나고 있죠.

심지어 매년 한인도기업인간 친선골프대회까지 열릴 정도라니까요
20여 년 전, 작은 영어 교실에 모인 3명의 한국인들은 서로의 영어 실력을 의식하며 어색해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색했던 순간이야말로, 오늘날 인도 사회에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낼 'K-웨이브'의 아주 작은 시작점이 아니었을까요?
이제 인도에서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면, "North or South?"라는 질문 대신 "BTS 좋아해요", "불고기 먹어봤어요", "나 서울 다녀왔어요" 라는 반가운 대답이 돌아옵니다. 지난 20여년간 제가 목격한 인도의 많은 변화 중에 가장 뿌듯한 변화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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