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20일, 수요일, 델리, 맑음, 36도

70.1 기온이 하루에 1도씩 올라간다.
지난주부터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상승하고 있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대충 하루에 최고기온이 0.5도~1도 정도씩 매일 올라가고 있다. 이렇게 가다가는 홀리축제(3월29일:겨울,봄을 무사히 지내고, 여름을 맞이하면서 이를 기뻐하고 축하하는 인도의 최고의 축제, 이들의 설날 같은 명절이다.) 지나고 나면, 약 40도 정도까지 올라갈 것 같다.
오늘 낮에는 35도 이상으로 올라갔고, 오후 7시까지 30도 이상의 기온을 계속 유지했다. 한 낮에는 마치 우리나라 한여름의 날씨를 느꼈다. 땅에서 열기가 후끈 올라온다.
아직까지는 별로 힘들지 않으나, 다음달에 진짜 여름이 올 때가 걱정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은근히 기대가 된다. 과연 어떨까? 모두들 저렇게 난리를 떠는데… 내가 은근히 기대가 된다는 말에 학교 사람들은 내가 제 정신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도 은근히 기대가 된다. 도대체 어떤 여름일까? 말로만 듣던 50도의 기온이란…?
대학생 때 미국에 간적이 있는데, 그때 라스베가스 사막 한가운데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43도 온도를 한번 겪은 바 있다. 그때도 정말 더웠다. 진짜 자동차의 쇠에 계란 올려놓으면 익어버릴 정도로 차도 뜨거웠고, 하늘을 감히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더웠으니깐.
그런데, 그 보다 높다…? 거기에 습도까지 있다고 하니… 오~ 기대된다.
2002년 3월 20일, 제 낡은 일기장에는 섭씨 36도의 날씨 속에서 다가올 50도의 여름을 상상하는, 지금 보면 참 철없는 호기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은근히 기대가 된다. 과연 어떨까?... 내가 은근히 기대가 된다는 말에 학교 사람들은 내가 제 정신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도 은근히 기대가 된다. 도대체 어떤 여름일까? 말로만 듣던 50도의 기온이란…?"
그때의 저는 주변 사람들의 공포 섞인 경고를 들으면서도, 마치 무서운 놀이 기구를 타기 직전처럼 그 극한의 경험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17번의 지독한 여름을 겪고 난 저는 그 호기심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깨닫고 쓴웃음을 짓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는 지난 17년간 인도인들이 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계절을 대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여름을 '적'으로 규정하고 싸우거나 피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거대한 순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즐기기'까지 합니다.
1. 계절의 변화를 '축하'하는 사람들
제가 발견한 인도인들의 가장 큰 특징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진심으로 기뻐하고 이를 축제(Festival)로 기념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계절의 변화는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 아니라, 신이 주신 새로운 선물입니다.
- 여름이 오면: 겨울이 끝나고 더위가 시작되는 것을 '홀리(Holi)'라는 축제로 축하합니다. 서로에게 색 가루를 뿌리며, 다가올 뜨거운 계절의 에너지를 환영합니다.
- 우기(몬순)가 오면: 타는 듯한 더위를 식혀주는 첫 비가 내릴 때,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우산도 쓰지 않고 비를 맞으며 춤을 춥니다. 몬순은 그들에게 생명과 환희 그 자체입니다.
- 겨울이 오면: 몬순이 끝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인도 최대의 축제 '디왈리(Diwali)'가 열립니다. 폭죽과 불빛으로 겨울의 시작을 알리고, 인도 전역은 결혼식 시즌(Wedding Season)에 돌입하며 축제 분위기가 절정에 달합니다.
2. 여름이 '필요한' 이유: 더위는 곧 풍요다
2002년의 저는 '더위=고통'으로만 생각했지만, 인도인들에게 여름은 고통 이전에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 농작물과 과일의 계절: 인도는 거대한 농업 국가입니다. 뜨거운 태양은 모든 곡식이 제대로 자라는 데 필수적인 에너지원입니다. 무엇보다, 인도인들이 열광하는 '과일의 왕' 망고가 바로 이 혹독한 여름 태양을 먹고 익어갑니다. "여름이 더워야 망고 농사가 잘된다"는 믿음은 단순한 속설이 아닙니다.
- 몬순을 부르는 힘: 이글거리는 여름의 폭염은 인도 대륙을 뜨겁게 달구어 저기압을 만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저기압이 저 멀리 인도양의 습한 공기, 즉 '몬순'을 끌어당기는 힘이 됩니다. 여름이 충분히 덥지 않으면 그해 몬순은 약해지고, 몬순이 약해지면 인도는 가뭄이라는 재앙에 빠집니다. 즉, 여름의 고통은 몬순이라는 축복을 받기 위한 필수적인 시련인 셈입니다.
3. 아이들에게 여름은 '자유'다
인도인들에게 여름이 즐거운 또 하나의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방학'**입니다.
45도를 넘나드는 혹서기에는 정상적인 학업이 불가능합니다. 2002년 제 일기에도 적혀있듯, 4월 중순부터 대부분의 학교가 일제히 방학에 들어갑니다. 아이들에게 여름은 더위가 아닌, 학교에서 해방되어 친척 집을 방문하고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자유'의 계절로 기억됩니다.
17번의 여름을 겪은 지금, 저는 여전히 인도의 여름이 덥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더위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20여 년 전, 36도의 날씨에 '50도'를 호기심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저는 그저 철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인도인들처럼, 이 뜨거운 태양이 있어야만 망고가 열리고, 이 고통스러운 열기가 있어야만 비가 내린다는 거대한 순환의 법칙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여름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저는 여전히 에어컨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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