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27일, 수요일, 델리, 맑음

77.1 힌디학교의 culture program
오늘 힌디학교에서 수업대신 각국 학생들이 준비해서 발표하는 culture program이 있었다.
각국 학생들이 준비한 각 나라의 전통음악과 전통춤, 그리고 문화를 소개하는 시간이었는데, 약 2시간 정도 진행이 됐다. 정말 재미있고,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오늘 공연된 내용을 열거하면,
인도네시아 전통춤, 우크라이나 전통춤, 일본전통악기 연주, 홀랜드 춤, 일본피리연주, 학생들이 하는 인도 전통춤, 전통노래, 요즘 춤, 요즘 노래, 미국학생이 준비한 치어리더 춤, 기타 연주, 등등… 한국인들은 군밤타령, 울산아가씨 노래를 불렀고, 하모니카연주, 그리고 인도노래를 불렀다.
사진을 무려 40장이나 찍었다.
진행 중에 실수도 많았지만, 서로 웃으면서 즐겼다.
각국의 학생들이 모두 모여서 서로 즐겁게 보낸 시간이었다.





2002년 3월 27일, 제 낡은 일기장에는 40장이 넘는 사진과 함께 그날의 흥분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힌디 학교에서 열린 '컬처 프로그램'. 지금 보면 소박한 학예회 같았지만, 20여 년 전 델리에서는 그야말로 '국제적인' 행사였습니다.
"인도네시아 전통춤, 우크라이나 전통춤, 일본전통악기 연주... 한국인들은 군밤타령, 울산아가씨 노래를 불렀고... 각국의 학생들이 모두 모여서 서로 즐겁게 보낸 시간이었다."
오래된 사진 속, 서툰 모습으로 각국의 문화를 소개하던 학생들의 얼굴에는 사뭇 진지함과 '우리 문화를 소개한다'는 사명감마저 서려 있습니다. 저는 비록 무대에 오르진 않았지만, 그날의 열기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습니다.
1. 2002년: 99.9%의 인도인, 그리고 배낭여행자
그 작은 교실의 발표회가 왜 그토록 특별하게 느껴졌을까요? 2025년인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2002년의 인도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닫힌 세상에 가까웠습니다.
- '관광객'이 없던 나라: 당시 인도는 '배낭여행자들의 성지'였을 뿐, 일반 외국인 관광객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타지마할이든, 꾸뜹 미나르든 어딜 가나 관광객의 99.9%는 인도인들뿐이었습니다.
- 'North or South?': 20여 년 전, 인도에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열에 아홉은 "North or South?"(북한? 남한?)라는 질문이 되돌아왔습니다. 인도는 비동맹 중립 노선을 견지하며 북한과도 오랜 수교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으니까요.
- 동물원 원숭이 취급: 델리 시내에서도 외국인은 워낙 드물다 보니, 어딜 가나 노골적인 시선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금처럼 쇼핑몰이나 거리에서 외국인을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풍경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처럼 보수적이고 닫혀있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러 나라의 학생들이 모여 각자의 문화를 나누었던 그날의 '컬처 프로그램'은, 델리에서 세계를 만나는 특별한 사건이었던 셈입니다.
2. 2025년: '국제화'가 일상이 된 도시
17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인도는 여전히 보수적인 면이 강하지만, 적어도 델리 NCR 같은 대도시는 2002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국제화되었습니다.
- 글로벌 푸드 코트: 2002년에는 '외국 음식'이라야 중국 음식이 전부였지만, 지금 델리와 구르가온의 쇼핑몰과 하이 스트리트(High Street)에는 정통 이탈리안, 멕시칸, 그리고 수많은 일식당과 한식당이 성업 중입니다. 인도인들의 입맛 자체가 국제화되었습니다.
- 쉽게 볼수 있는 외국인들: 이제 관광지는 물론, 쇼핑몰, 카페, 레스토랑에서 외국인을 마주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습니다. 인터내셔널 스쿨에는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학생들이 인도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 OTT와 유튜버가 연 세상: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넷플릭스, 유튜브 같은 글로벌 OTT가 있습니다. 인도의 젊은 세대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전 세계의 문화를 실시간으로 접하고 있으며, 외국 문화에 대한 포용력과 관심은 20여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습니다.
3. 특별해진 한국의 위상: 'K-Company'에서 'K-Culture'로
이 거대한 국제화의 흐름 속에서도, 특히 '한국'의 위상은 지난 20년간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 1차: 'Made in Korea'의 신뢰 (경제): 1990년대 말 인도에 진출한 현대자동차, LG전자, 삼성전자는 인도 시장에서 '프리미엄', '고품질', '신뢰'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 1세대 기업들은 인도인들에게 **"한국 = 잘살고 부지런한 기술 강국"**이라는 강력하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습니다.
- 2차: 'K-Culture'의 습격 (문화): 이 경제적 기반 위에, 최근 몇 년간 K-드라마와 K-Pop이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타고 인도의 젊은 층을 사로잡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의 불시착', '오징어 게임'의 폭발적인 인기, BTS와 블랙핑크의 팬덤은 이제 인도에서도 하나의 사회 현상입니다.
- 3차: 'K-Lifestyle'의 확산 (생활): K-컬처의 인기는 자연스럽게 K-Food와 K-Beauty로 이어졌습니다. 델리 NCR에만 10곳이 훌쩍 넘는 한식당이 성업 중이고, 한국 물건을 파는 슈퍼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인도 최대의 뷰티 플랫폼 'Nykaa'에서 한국 화장품(K-Beauty)은 가장 '핫'한 카테고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2002년, 델리의 작은 교실에서 서툰 발음으로 '군밤타령'을 부르던 그 학생들은, 어쩌면 인도에서 K-컬처를 알린 1세대 민간 외교관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날의 소박했던 발표회가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인도 전역의 쇼핑몰에 울려 퍼지는 K-Pop과, 인도인들의 저녁 시간을 사로잡은 K-드라마로 되돌아왔다고 생각하니, 20여년간의 세월이 만들어낸 이 거대한 변화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됩니다.
그나저나 그때 저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고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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