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월4일, 목요일, 델리, 맑음

85.1 영어개인교습 선생을 바꿨다.
오늘부터 오전에 하던 영어개인교습 선생을 바꿨다.
전에 하던 애가 처음에는 열심히 하는 거 같더만 가끔씩 지각을 하더니, 어제 시간이 없어서 도저히 안되겠다고 하면서 그만 두었다.
그래서 어제 학교에서 고민 좀 하다가 우리 힌디학교 학생 중에서 독일아줌마가 있는데, 영국에서 7년간 살다 온 아줌마다. 영어를 마치 모국어마냥 하는 아줌마인데, 그 아줌마에게 부탁을 했다. 그랬더니, 다행스럽게도 아줌마가 그냥 매일 아침 30분씩 일찍 오면 공짜로 해주겠다고 한다.
그래도 어떻게 공짜로 하겠냐고 하면서 내가 수업료 낼 테니깐, 아침에 1시간씩 해주면 안되겠냐고 부탁을 했다. 조금 고민을 하는 기색이었으나, 이내, 그렇게 하기로 했다.
왜 고민했냐고 물었더니, 아침에 버스가 없어서 1시간 일찍 오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업료 받으면 그것으로 택시비 하면 되겠다고 하며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이다.
참 고마웠다.
오늘 아침에 처음 수업을 했다.
전에 가르치던 애보다 훨씬 낫다. 많은 도움이 된다.
매일 아침에 수업시작하기 전에 1시간씩 공부하기로 했다. 그리고 주말에 시간이 나면 추가로 할수 있으면 하자고 부탁했다.
부제: 2002년 독일인 선생님과 스티브 잡스, 그리고 NGO 활동가들
2002년 4월 4일, 제 낡은 일기장에는 새로운 영어 선생님을 구한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그녀는 영국에서 7년을 살다 온 독일인으로, 힌디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던 학생이었습니다.
"아줌마가 그냥 매일 아침 30분씩 일찍 오면 공짜로 해주겠다고 한다... 왜 고민했냐고 물었더니, 아침에 버스가 없어서 1시간 일찍 오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업료 받으면 그것으로 택시비 하면 되겠다고 하며 그렇게 하기로 했다."
택시비가 부담스러워 버스 시간을 고민하던 그녀. 그녀는 NGO 소속의 자원봉사자로, 인도인들과 똑같은 버스를 타고,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소박하게 살아가던 분이었습니다. 20여 년 전, 갓 인도에 도착한 저에게 그녀의 삶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외국인은 다 부자처럼 사는 게 아니구나."
20여년이 지난 지금, 저는 확신합니다. 인도라는 나라의 진짜 매력을 가장 깊이 있게 경험하는 이들은 어쩌면 에어컨 빵빵한 사무실의 주재원이 아니라, 땀 냄새 나는 현장에 스며든 바로 이들일지도 모른다고요.
1. 낮은 곳의 천사들: 인도의 NGO와 외국인 활동가들
인도에는 공식적으로 등록된 NGO만 약 300만 개가 넘습니다. 이는 인구 400명당 1개꼴로, 병원이나 학교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이 거대한 비영리 섹터에는 수많은 외국인들이 들어와 활동하고 있습니다.
- 어떤 단체들인가?:
- 국제기구 및 대형 NGO: '국경없는의사회(MSF)',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 '옥스팜(Oxfam)' 등 세계적인 단체들이 인도 전역에서 의료, 교육, 구호 활동을 펼칩니다.
- 종교 기반 단체: 콜카타의 **'사랑의 선교 수녀회(Missionaries of Charity)'**는 마더 테레사의 뜻을 이어받아 지금도 전 세계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이 빈민과 병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 선교사분들 또한 오지에서 학교와 병원을 세우며 헌신하고 계십니다.
- 로컬 밀착형 단체: '군지(Goonj)'처럼 의류 재활용을 통해 빈곤 문제를 해결하거나, '티치 포 인디아(Teach For India)'처럼 교육 불평등을 해소하는 로컬 단체에도 많은 외국인 펠로우들이 참여합니다.
- 오로빌(Auroville): 폰디체리 근처의 이 실험적인 공동체는 50개국 이상에서 온 3,000여 명의 외국인들이 국적과 종교를 초월하여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대표적인 곳입니다.
- 그들의 생활 방식: 이들은 외국인 전용 거주지(외국인들이 주로 모여 사는 매우 비싼 동네)가 아닌, 일반 주택가나 시골 마을에 거주합니다. 오토 릭샤와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로컬 시장에서 장을 봅니다. 이들에게 인도는 '근무지'가 아니라 '삶의 터전'입니다.
2. 영혼을 찾아온 구도자들: 스티브 잡스에서 오쇼까지
또 다른 부류는 인도의 정신적 유산에 매료되어 스스로 '불편함'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 맨발의 스티브 잡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1974년, 19살의 나이에 인도를 찾았습니다. 그는 7개월간 승려복(Kurta)을 입고 맨발로 걸으며, 히말라야와 아쉬람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는 훗날 "인도에서의 경험이 직관(Intuition)을 깨우쳐 주었고, 이는 서양의 이성적 사고보다 훨씬 강력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의 아이폰 디자인 철학인 '단순함(Simplicity)'은 인도의 비움의 미학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오쇼 아쉬람(Osho Ashram)과 리시케시: 지금도 푸네(Pune)의 오쇼 명상 센터나 요가의 성지 리시케시에는 전 세계에서 온 외국인들로 북적입니다. 이들은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년씩 머물며 채식을 하고, 요가를 하며, 명상을 즐깁니다. 화려한 문명을 뒤로하고 내면의 평화를 찾아온 이들에게 인도의 '불편함'은 오히려 수행의 일부가 됩니다.
(몇개월 뒤에, 아마도 7월쯤? 저도 뿌네의 오쇼 아쉬람에 들리게 됩니다. 거기서 4박5일을 있으면서 명상을 체험합니다. 그때 오쇼 아쉬람에 대한 포스팅을 상세하게 하겠습니다.)
3. 왜 그들은 '현지인처럼' 사는가?
왜 굳이 편안한 길을 두고 힘든 길을 택할까요? 제가 2002년 LG전자의 지역전문가로서 하숙집에 살고 버스를 타고 다녔던 이유와 비슷할 것입니다.
- 진짜 이해: 유리창 너머로 보는 세상과, 직접 흙을 밟으며 만나는 세상은 다릅니다. 현지인처럼 먹고 자고 이동할 때 비로소 그들의 눈높이에서 문화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습니다.
- 경계 허물기: 외국인이 로컬 버스에 오르는 순간, 그들은 '관광객'이나 '갑'이 아니라 '이웃'이 됩니다. 그 독일 아주머니가 택시비가 없어 고민했던 그 순간, 그녀는 인도인들에게 가장 진솔한 친구가 되었을 것입니다.
2002년의 독일 아줌마 선생님은 저에게 영어뿐만 아니라, 인도를 대하는 태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저 역시 16년간의 주재원으로 살며 편안함에 익숙해졌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그때의 버스 티켓 한 장이 남아있습니다.
인도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건, 어쩌면 그 나라의 가장 빛나는 곳뿐만 아니라 가장 낮은 곳의 흙먼지까지도 기꺼이 옷자락에 묻힐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 아닐까요?
'인도 > 인도 지역전문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87. 인도 음식 적응의 최종 관문, '탈리(Thali)'를 아시나요? (0) | 2025.11.26 |
|---|---|
| 86. 인도 음력!! 두 개의 시간을 사는 사람들: 서양의 직선, 인도의 순환 (0) | 2025.11.25 |
| 84. 맨발의 인력거꾼을 보며: 인간의 존엄과 생존의 딜레마 (0) | 2025.11.23 |
| 83. 인도는 엉망이다? 선입견을 깨는 '의외로' 정확한 시스템들 (0) | 2025.11.21 |
| 82. 인도 주재원 17년 차의 고백: 우리는 과연 인도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0) | 2025.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