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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인도 지역전문가

160. [인도 뭄바이 Part 12] 크리켓, 인도의 '기형적' 스포츠 구조에 대하여

by 인도 전문가 2026. 1. 17.

2002년 6월18일, 화요일, 뭄바이, 비

 

160.1 TV로 축구관전  이탈리아를 격파하다.

오늘 아침부터 가슴이 설레었다.

12시부터는 일본과 터어키간의 16강전이 있고, 오후 5시부터는 우리나라와 이탈리아의 16강전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모두 하루의 중간에 껴 있어서 오늘 사실 아무것도 못했다. 아침에 책보다가 일본 축구경기만 보고, 낮에는 책보고 저녁에는 한국축구 봤다.

결론적으로 지금 현재 아주 기분이 좋다.

우리나라가 세계6위의 이탈리아를 극적으로 격파했기 때문이다.

정말 신났다. 그래서 호텔 옥상에 있는 바에서 맥주도 마셨다. 정말 신나는 날이다.

우리나라 축구 정말 잘한다. 이렇게만 하면 결승전까지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오늘 축구 때문에 아무 생각이 안 난다. 정말 신나는 날이다.


[인도 뭄바이] 2002년 월드컵의 추억, 그리고 인도의 '기형적' 스포츠 구조에 대하여

'2002년 6월 18일, 화요일, 뭄바이, 비.'

오늘의 일기는 그 어떤 날보다 짧지만, 그 어떤 날보다 강렬한 감정이 느껴집니다. 바로 2002년 한일 월드컵 16강전, 대한민국이 이탈리아를 상대로 기적 같은 역전승을 거둔 그날이기 때문입니다.

<2002년 6월 18일의 일기>

TV로 축구 관전 – 이탈리아를 격파하다. 결론적으로 지금 현재 아주 기분이 좋다. 우리나라가 세계 6위의 이탈리아를 극적으로 격파했기 때문이다. 정말 신났다. 그래서 호텔 옥상에 있는 바에서 맥주도 마셨다. 오늘 축구 때문에 아무 생각이 안 난다. 정말 신나는 날이다.

먼 이국땅 호텔방에서 혼자 TV를 붙잡고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모릅니다. 일기에 다른 내용이 하나도 없는 걸 보니, 정말 이날은 축구 말고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2002년의 뜨거웠던 축구 열기를 빌려, 조금은 냉정한 시선으로 인도의 스포츠, 특히 '왜 인도는 스포츠 약소국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1. 14억 인구의 미스터리: 왜 올림픽 메달이 없을까?

인도는 14억이 넘는 엄청난 인구를 가진 나라입니다. 북인도 사람들의 건장한 유럽형 체격부터, 남인도나 동인도 사람들의 민첩한 동양형 체격까지 다양한 신체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론상으로는 스포츠 강국이 되고도 남을 잠재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합니다. 하계 올림픽 역대 성적을 보면 인도는 금메달이 10개 안팎에 불과합니다. 그마저도 필드하키(과거의 영광)와 최근의 사격, 투기 종목에 편중되어 있습니다. 인구 대비 올림픽 성적으로는 세계 최하위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인도에도 다양한 프로 리그가 존재합니다. '인도 슈퍼 리그(ISL)'라는 프로 축구도 있고, 인도의 전통 투기 종목인 '프로 카바디 리그(PKL)'는 나름대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철저히 '국내용'일 뿐, 세계 무대에서의 경쟁력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저는 그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인도 국민 스포츠, '크리켓(Cricket)'에 있다고 봅니다.

2. 스포츠를 넘어선 종교, '크리켓'이라는 거대한 블랙홀

크리켓은 야구의 원형이 된 스포츠로, 주로 영국과 과거 영연방 국가들(호주, 남아공, 파키스탄 등)에서 인기가 있습니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여러 인기 스포츠 중 하나지만, 인도에서 크리켓의 위상은 완전히 다릅니다.

인도에서 크리켓은 단순한 인기 스포츠(Popular)를 넘어 '과잉 인기(Over Popular)' 상태입니다. 스포츠가 아니라 일종의 '종교'에 가깝습니다.

  • 일상 속의 크리켓: 뭄바이의 좁은 골목길(Gully)이나 넓은 공터(Maidan)에 가보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크리켓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장비도 필요 없습니다. 나무판자때기 하나와 테니스 공만 있으면 수십 명이 하루 종일 놉니다. 주말 공터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뒤엉켜 여기저기서 공을 던지고 치는 진풍경이 벌어집니다.

  • 국가적 집착: 특히 숙명의 라이벌인 파키스탄과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인도는 나라 전체가 멈춥니다. 공무원들은 일찍 퇴근하고, 회사에서도 일을 제쳐두고 TV 앞에 모입니다. 심지어 중요한 비즈니스 전시회가 열리는 전시장에서도 대형 스크린에 전시 홍보 영상 대신 크리켓 중계를 틀어놓을 정도입니다.

골목마다 저런 풍경은 일상입니다.
골목마다 저런 풍경은 일상입니다.

3. 모든 자원을 빨아들이는 'IPL(인도 프리미어 리그)'

이러한 엄청난 인기를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크리켓 프로 리그인 'IPL(Indian Premier League)'입니다.

인도의 크리켓 프로리그 입니다. 일명 IPL
인도의 크리켓 프로리그 입니다. 일명 IPL

IPL의 브랜드 가치와 중계권료는 천문학적인 수준이며, 미국의 NFL이나 NBA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스포츠 리그로 성장했습니다. 인도의 모든 대기업 스폰서십과 미디어의 관심이 오직 IPL로만 쏠립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운동에 재능 있는 아이들은 모두 크리켓 배트를 잡으려 합니다. 비인기 종목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것보다, IPL 팀의 벤치 멤버가 되는 것이 훨씬 더 큰 부와 명예(심지어 사친 텐둘카르 같은 전설적인 선수는 상원의원까지 됩니다)를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크리켓이라는 거대한 블랙홀이 인도의 모든 스포츠 자본, 인재, 관심을 빨아들이면서 다른 종목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 자체를 말려버린 것입니다.


'마무리하며'

제가 한 인도인 친구에게 인도인들은 왜 그렇게 크리켓만 좋아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장 가성비가 좋은 스포츠니까. 공 하나랑 몽둥이 하나만 있으면 가난한 아이들 20명이 하루 종일 놀 수 있잖아. 인도에 이만한 스포츠가 어디 있겠어?'

그의 대답에서 인도의 현실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사람 많은 나라에서 자연스럽게 선택된 국민 스포츠. 하지만 그 압도적인 사랑이 역설적으로 인도를 '스포츠 약소국'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2002년 다양한 종목의 선수들이 활약하며 온 국민을 열광시켰던 한국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묘한 대조를 이루며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